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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인물 재해석" 이야기

<이완용> 조선을 배신한 친일파, 역사의 깊은 상처 😡

by 10분의 쉼표 2024.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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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한국의 대표적인 친일파로, 일본 제국과의 협력을 통해 을사늑약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완용은 일본으로부터 후작(伯爵,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이는 그가 일본 제국에 협력한 대가였습니다. 그는 오늘날까지도 한국 민족의 자주권을 상실하게 만든 배신자로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이완용(1858–1926)은 한국 역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친일파로, 을사늑약(1905)과 한일병합조약(1910)을 통해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배신자와 "경술국적"으로 기억되며, 그가 남긴 상처는 오늘날까지도 한국인들의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 이완용의 생애와 개화파 활동

<1889년 5월 6일 이완용과 조선의 외교사절단이 미국의 마운트 버넌을 방문했을 당시의 사진> 이 당시 마운트 버넌은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영묘 가 있는 역사적 장소로, 이들은 미국의 문물을 탐방하며 외교적 교류를 진행했습니다. 이 사진에는 (왼쪽부터) 이하영, 이채연의 부인, 이채연, 알렌과 알렌의 딸, 이완용, 이완용의 부인이 함께 했습니다. 이완용이 친일파로 변모하기 전, 조선의 개화파로서 미국과의 외교적 관계를 구축하려 했던 시기의 중요한 장면 중 하나입니다.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이완용은 개화파 정치인으로 출발해, 처음에는 조선의 근대화를 지지했습니다. 그는 육영공원에서 서양 문물을 접하며 미국과의 외교 업무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면서 1894년 청일전쟁 이후 그는 일본과 협력하는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처음에는 고종의 신임을 받았던 이완용은, 일본의 식민 통치를 돕는 정치적 입지를 구축하며 조선 민중들에게 큰 배신감을 안겨주었습니다. 특히, 그의 변절은 개인적인 이익권력을 위해 조선을 일본에게 넘기는 역사적 배신으로 기록됩니다.

🤝 을사늑약과 한일병합 - 민족의 배신

<을사늑약 체결을 축하하는 일본 고위 관리들, 이토 히로부미 장군을 포함한 기념사진> 을사늑약 체결 후 일본 고위 관리들, 특히 이토 히로부미가 체결을 축하하는 사진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는 조선 내에서 조약에 대한 심각한 반발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정부 관료들과 일반 민중들이 덕수궁 앞에서 격렬하게 항의하고 있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1905년, 이완용은 을사늑약에 서명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겼습니다. 이는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시키는 사건으로, 민족에게는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완용은 을사오적 중 한 명으로 기록되며, 그의 이름은 민족적 배신자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는 독립운동의 불씨가 되었고, 그에 대한 암살 시도까지 있었습니다​.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척, 이척 李坧)이 서명하고 날인한 이완용의 총괄 위임장> 중요한 것은, 황제의 이름인 '坧'이 서명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대한제국의 주권이 일본에 넘어가기 직전, 마지막 황제가 이완용에게 권력을 이양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의미합니다. 이완용은 이 권한을 바탕으로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는데 핵심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1910년, 이완용은 한일병합조약에 서명하여 조선을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조선은 자주권을 잃었고, 그는 일본으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으며 일본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배신은 조선 민족에게 깊은 상처분노를 남겼습니다​.

👎 최후와 역사적 평가

<친일세도가로 위세를 떨치던 시절의 이완용 3대> 앉은 사람이 이완용, 가운데 선 사람은 아들 항구, 왼쪽 뒤는 장손 병길, 오른쪽 선사람은 차선 병희, 왼쪽 앞줄에 선 사람이 3손 병주, 품에 안긴 아이는 4손 병철. 이 때만 해도 이완용의 묘가 병주의 아들 석형에 의해 폐묘되는 상태가 일어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1926년 2월 13일자 매일신보. 이완용의 사망 소식을 대서특필로 보도했다.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1909년 12월 24일자 황성신문. 12월 22일 낮에 명동성당에서 이재명 의사에게 칼에 찔려 병원으로 이송되었다고 보도한 내용> 1909년 12월 22일, 이완용은 벨기에 레오폴 2세 왕의 추도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명동성당으로 가던 중 이재명에게 암살 시도를 당했습니다. 이재명은 군밤장수로 변장해 이완용의 옆구리와 어깨를 찔렀고, 인력거꾼 박원문이 사망했습니다. 이완용은 폐가 관통되는 중상을 입었으나 2개월 후 회복 했지만, 결국 폐질환으로 사망했습니다. 이재명은 1910년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이완용은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으로부터 많은 특혜를 받으며, 서울 종로구에서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으로서 일본의 식민 통치를 도왔으며, 그의 이름은 배신자와 민족의 적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습니다. 1926년에 사망한 후, 그의 묘는 여러 차례 훼손되었고, 결국 1979년에 화장되었습니다​.

이완용은 해방 후에도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한국 민족의 자주권 상실을 상징하는 인물로 기억됩니다. 오늘날 그는 역사적 반성의 대상으로 남아 있으며, 그의 행적은 한국 근대사에서 중요한 교훈을 남기고 있습니다.


10분의 쉼표에서는 이완용의 배신 행적을 되새기며, 역사를 통해 얻어야 할 교훈과 민족 자주성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의 행적은 단지 과거의 일이 아닌, 현재와 미래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역사의 아픔을 반성하며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참고 문헌

  1. Wikimedia Commons: 이완용 관련 이미지. Wikimedia Commons.
  2. 위키백과 - 이완용: 이완용의 생애, 을사늑약, 한일병합과 관련된 정보. 위키백과 - 이완용.
  3. 위키백과 - 을사오적: 이완용이 포함된 을사오적 명단과 관련 역사적 평가. 위키백과 - 을사오적.
  4. 위키백과 -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대한민국에서 발표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위키백과 -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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